해미읍성 성곽을 쌓기 시작한 연대는 전해지는 기록 문헌이 없어 알 수 없지만 병마절도사영이 주둔한 이후부터 축성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성곽의 성돌에 공주, 청주 등의 지명을 공사 구간별로 음각으로 표시된 것을 볼 때 관할지역의 장정들을 동원해서 성을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성곽 축성이 완공된 것은 진남문의 안쪽 상단의 장대석에 '황명홍치사년신해건(皇明弘治四年辛亥建)' 이라고 음각된 명문으로 볼 때 조선 성종 22년(1491)에 축성이 완공된 것으로 본다.
1926년 발간된 서산군지에는 성곽 둘레 6,630척, 높이 13척, 치성 380첩, 옹성 2개소, 문은 동서남문이 있고 북문과 초루와 포루는 없으며 성내에 우물이 6개소, 탱자나무가 성곽을 둘러싸고 있으며, 관아건물로 동헌, 객사, 아관청, 작청, 장군청, 현사청, 내아, 옥사, 책실, 사령청, 교련청, 관노방, 고자실, 외삼문, 내삼문, 동서남문루가 있으며 그 규모와 면적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진남문 우측에 현존한 '해미좌영루첩중수비'의 기록문에 헌종 14년(1849) 박민환이 해미 겸영장으로 부임하여 헌종 17년(1850)까지 폐허된 읍성을 크게 중수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조선말엽에 크게 수축했음을 알 수 있다. 읍성내의 관아 건물들은 대체로 일제 초기까지 존재하였으나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성내메 학교, 면사무소, 우체국 등 현대 건물을 건축하면서 관아건물 대부분 매각되거나 다른 곳으로 이축되어 훼손이 극심하였다.
현재 읍성내 복원된 건물은 동헌, 관아문, 책실, 객실, 동헌부속사, 망루(청허정), 동문, 서문, 남문, 포루 2동 등 11동의 관아 건물이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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